쇼와 12년(1937) 경에 교토 우지 지역의 차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출토 상황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명확하지 않지만, 간코 2년(1005)에 헤이안시대 귀족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가문의 보리사로 세웠던 조묘지(浄妙寺) 절 근방에서 출토된 점이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점 등을 고려하면 후지와라 일족 중 누군가의 무덤 부장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바탕흙의 질감이나 유약 색깔, 형태 등의 여러 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때, 오대(907~960) 혹은 북송(960~1127) 초기에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월주요(越州窯)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라시대부터 헤이안시대 초기까지 견당사(遣唐使)는 중국과 일본 간 교류의 주역이었으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의 진언으로 간표 6년(894)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중국이나 신라의 상인들이 빈번하게 일본에 왔고 귀족들은 상인들이 가져오는 중국의 재화를 앞다투어 모았다. 도자기 중에서는 특히 월주요에서 생산된 청자를 선호한 듯하며 당시 귀족들의 저택 유적지에서 자주 출토될 뿐만 아니라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나 《우쓰호모노가타리[宇津保物語]》 등 당시의 문학 작품에도 월주요 청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비색(秘色)’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다만 출토된 월주요 청자의 대부분이 작은 사발과 접시 등으로, 이 주전자처럼 크기가 큰 것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