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카이(774-835)가《능단금강반야경(能断金剛般若経)》을 밀교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제목 속에 보이는 개제(開題)란 경전의 이름을 해석하여 그 대강의 요점을 서술한 것을 말한다.
《금강반야경》의 한역은 모두 여섯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으나 구카이는 당나라 의정(義浄)의 번역본을 사용했다.《금강반야경》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널리 신앙되면서 그 영험기(霊験記)*와《금강반야집험기(金剛般若集験記)》등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나라(奈良) 시대에 이미 관립 사경소에서 금강반야경이 대량으로 사서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는《금강반야경》에 대한 신앙이 더욱 확산되며 당나라에서 가져온《금강반야경집험기》속에 등장하는 설화가《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나《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등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이《금강반야경 개제》는 교토 다이고지(醍醐寺) 절의 산보인(三宝院)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외부로 유출된 뒤 흩어져 지금은 전체 가운데 약150행만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38행)은 다카마쯔미야(高松宮)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며 그밖에 교토 국립박물관 소장의 63행 그리고 몇 점의 단편이 전하고 있다. 잔권과 단편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86행은 관동 대지진(1923년)때 소실되었다.
한편 후지와라 가도노마로(藤原葛野麻呂 755-813)는 견당대사(遣唐大使)가 되어 804년 구카이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갈 때 폭풍을 만나 한 달여 정도를 표류하였다. 그때 가도노마로는 187개소를 주재하는 신들에게《금강반야경》을 사서하여 받칠 것을 서원하면서 여행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후 당나라에 무사히 도착한 가도노마로는 귀국한 뒤 813년 10월 서원한 대로《금강반야경》187권을 사서하여 각각의 신들에게 공양하였다.
이때 구카이가 가도노마로를 대신해 서원문을 집필하였기 때문에 이《금강반야경 개제》도 그 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글 속에는 가필과 정정을 한 곳들이 보여 초고임을 말해 준다.
*영험기:불가사의한 감응과 이익 등을 기록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