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일본에서는 신을 숭배해 왔는데, 원래 신의 모습을 형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없었으나 8세기에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상(神像)을 조영하기 시작하였다. 9세기 후반 무렵부터 신상의 독자적인 표현이 시도되었다. 11세기에는 옷주름 표현이 간소화되고 몸통 부분의 두께감이 평평해졌으며 크기가 소형화되면서 12세기에는 신상의 독자적인 표현이 확립되었다.
이 조각상은 긴 몸통 부분의 두께가 얇고 다리 부분은 무릎 사이 간격이 좁으며 옷주름 표현은 간략화되어 있는데, 이는 12세기 무렵에 제작된 신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다. 바탕에 직접 백토를 바르고 채색하는 것도 신상에 널리 공통되는 마감 방식이다. 얼굴은 갸름하고 볼에는 탄력이 있다. 눈썹은 완만하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관자놀이까지 이어지며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길다. 코는 작고 입은 큼직하게 표현되었으며 윗입술을 약간 내밀고 있고 인중도 선명하게 나타냈다.
가늘고 긴 눈매와 튀어나온 윗입술로 이뤄진 이목구비, 몸통이 길고 측면의 두께는 얇은 몸의 비율, 노송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깎아 만든 뒤 옆 부분에 다른 목재를 이어 붙인 구조, 흰 점으로 구성된 꽃문양, 얕게 조각된 옷주름 표현 등, 규슈국립박물관 소장 <여신 좌상>(C63)과 그 특징이 매우 비슷하다. 이 <남자 신상>은 나무 바깥쪽부터 마름질하였고 <여신 좌상>(C63)은 나무 안쪽부터 마름질하였다. 몸통 중심 부재의 폭이 거의 일치하며 바닥 면에 보이는 나이테 폭도 매우 닮아 있어, 두 신상이 동일한 나무를 깎아서 한 쌍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채색 등 표면의 보존 상태도 비슷하며 뒷면에 뚫린 작은 구멍의 위치가 일치하는 점에서도 두 신상은 한 쌍을 이루어 같은 장소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구 국보 지정서’를 통해 1940년에는 마에야마 고헤이(前山宏平) 선생이 소장했던 사실이 밝혀졌고 그 이듬해에는 도쿄 오쿠라집고관(大倉集古館)이 개최한 <신도 미술 전람회>에 출품되었는데, 이 전람회에서는 규슈국립박물관 소장 <여신 좌상>(C63)과는 별개의 여신 좌상과 쌍을 이루어 전시되었다. 원래 한 쌍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남자 신상>과 <여신 좌상>(C63)이 한곳에 모임으로써 헤이안시대 후기의 신상을 대했던 신앙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작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