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만(華鬘)은 고대 인도에서 귀인에게 바치는 생화에 기원이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당내의 벽에 거는 등 장엄구로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생화를 대신하여 쇠가죽, 금속류, 나무, 옥, 비단 등의 재료로 한 화만을 이용하였으며 옆으로 긴 타원형의 부체 모양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부채 모양의 쇠가죽 화만으로 교토 토지(東寺)에서 전래되었다. 현재 원형을 갖추고 있는 13개 외에 화만의 일부가 남아 있다. 모두 투조한 소의 가죽에 옻칠을 하여 굳히고 그 위에 채색으로 문양을 입혔다. 13개의 화만은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생화처럼 보이게 한 보상화(寶相華) 문양을 바탕으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가릉빈가(迦陵頻伽, 사람의 머리를 한 극락세계의 새)를 표현하였다. 중앙에는 생화를 묶은 흔적이 남아있는 리본 모양이 있다. 가릉빈가는 각각 부처 보살을 찬양하기 위한 산화(散華)용 꽃을 담은 화롱(華籠)을 들고 있다. 또 다른 형식은 리본을 중심으로 전면에 보상화당초문을 표현한 것이다.
13점의 화만에서는 각각 작풍의 차이가 있다. 가릉빈가와 보상화당초문의 화만에도 적어도 3~4 종류의 작풍이 섞여 있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하나의 세트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중 작풍이 가장 뛰어난 ‘등호(登號)’와 ‘지호(知號)’는 가릉빈가의 육체에 붉은 선을 칠했고 옷 주름은 치밀한 키리카네 기법(금박을 가늘게 잘라 붙이는 기법)이 구사되는 등 헤이안 시대(794~1185)의 불교 회화 기법이 엿보인다. 또한 보상화당초문 화만에도 채색의 농담 차이가 엿보이는 운간(繧繝) 채색 위에 키리카네 기법을 병용하였다.
보상화를 바탕으로 가릉빈가를 마주보게 하는 도상은 12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이와테 지역의 츄손지콘지키인(中尊寺金色院)에 있는 금동투조화만에도 있으나 대범한 분위기를 갖는 본 작품은 이에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이 없어 13점의 화만이 토지의 어느 당우(堂宇)에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작 시기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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